엘렌 지 화잇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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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건물을 세움

넉 달 동안 제재소와 목수들은 매우 만족스럽게 공사를 진척시켰다. 여 기숙사는 거의 완성되었고, 식당의 기초 지주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건축가의 계획에 따르면, 이 건물은 가로 이십사 미터, 세로 팔 미터 크기의 단층 건물로, 식당과 식료품 저장실과 부엌과 창고 등을 갖출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 운영회는 세번째 건물을 신속하게 세울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이층을 올리기로 계획하였다. 완공하지 않은 채 방치해둔 한쪽 끝을 한동안 예배실로 사용하고, 나머지 부분은 열두어 명의 청년들의 숙소로 융통할 수 있을 것이었다. LS 364.2

이 건물 건축이 삼분의 이가량 진척되었을 때, 재무는, 자금이 바닥 났으므로 작업을 천천히 진행시켜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개강 날짜가 박두하자, 학교 사업관계자들은 공부하러 올 학생들을 적절히 돌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참으로 불행할 것이라고 느꼈다. 화잇 여사는 학교 운영회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듣고 “학교는 광고된 날짜에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대해 건축자들은 “불가능합니다. 도저히 기일 내에 완공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LS 365.1

이 일을 해결할 방도는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연합하고 사심 없이 협동하여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일이다. 화잇 여사는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뒤이은 몇 주 동안의 경험을 나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는 일요일 아침 여섯시에 집회를 열기로 정하고 교우들도 함께 소집하였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 앞에 현 상태를 내보이고 노력(勞力) 봉사를 요청하였다. 30명의 남녀가 일하기로 자신을 드렸으며, 비록 시간을 내기 어려웠지만, 그 건물이 완성되고 깨끗이 청소되고 가구를 비치하여 개교일로 예정한 그 날에 사용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작업을 계속하였다.” LS 365.2

1897년 4월 28일, 예정된 날짜에 S.N.해스켈 목사 부부와 H.C.레이시 교수 부부를 교사로 모시고 학교를 개강하였다. 첫날에는 등록생이 단 열 명뿐이었으나 학교가 실제로 열려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자 다른 사람들이 왔다. 한 달 후, C.B.휴즈 교수 부부가 교사진에 합류했을 때는 거의 30명의 학생이 참석하였다. 학기가 계속되면서, 거기서 가르치는 교훈의 특성이 교회에 소개되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공부하고자 많은 애를 썼다. 그 결과, 학기가 끝나기 전에 모두 60명이 등록하였고, 그 중에 약 40명이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였다. LS 3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