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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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마태복음 7장 3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는 충고라 할지라도,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의 죄의 과중함은 다 나타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MB 125.1

그분의 말씀은 타인의 결점을 잘 찾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품성이나 생활에서 결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그는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몹시 안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와같이 비 그리스도적인 행동을 통해 꼴 지워지는 품성의 특성은 비판의 대상이 된 결점과 비교할 때 마치 티에 대한 들보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는 회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해 구주의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을 여는 감화를 끼치지 못한다. 이들은 복음의 따뜻하고 친절한 정신을 잘못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귀한 영혼들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 구주께서 사용하시는 비유에 의하면 비판적인 정신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가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욱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동일한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거기에 자만과 비평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MB 125.2

그리스도만이 품성의 유일한 표준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표준으로 삼는 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게 된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요한복음 5장 22절)셨으므로, 사람들의 동기를 비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다시 찬탈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판관과 비평가의 위치에 서는 자들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는 적그리스도 편에 자신을 두고 있다. MB 125.3

가장 불행한 결과로 이끌어 가는 죄는 바리새 주의의 특성인,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신앙 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지 않으신다. 즉 그분의 임재의 빛이 거기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부지런히 활동하고 그리스도와 무관한 열성을 아무리 낸다 해도, 이 부족을 메울 수는 없다.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는 데 남다른 지각과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에 빠져 있는 각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신다. 죄를 지어 켕기는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죄를 알아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감추거나 변명하려고 애쓴다. 사람이 악을 알게 된 것은 죄로 말미암아서였다. 최초의 부부는 죄를 범하자마자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 본성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 MB 126.1

사람들은 이 비난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면 형제의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만일,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그 형제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시킬 수 없게 되면, 그들은 강제적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들의 힘이 미치는 한 사람들을 강요하여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당시에 유대인들이 한 일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실했을 때 언제나 해 온 것이다. 교회는 자체에 사랑의 능력이 없음을 알았을 때 교리를 강조하고 교령(敎令)을 집행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가의 권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에 지금까지 제정된 모든 종교적 법령의 비밀과 아벨의 시대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핍박의 비밀이 있다. MB 126.2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당신께로 이끄신다. 그분께서 사용하시는 유일한 강제 수단은 사랑의 강권이다. 교회가 세속적 권세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 곧 거룩한 사랑으로 강권하는 능력이 부족한 증거이다. MB 127.1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각 교인에게 있으며 치유가 이루어져야 할 곳도 바로 여기이다. 예수께서는 비난하는 자들에게,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비난하는 정신을 버리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누가복음 6장 43절)기 때문이다. 그대가 빠져 있는 이 비난하는 정신은 악한 열매이며, 그 나무가 나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대 자신을 독선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심령의 변화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나무라는 위치에 서기 전에 먼저 이 경험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대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마태복음 12장 34절)하기 때문이다. MB 127.2

어떤 사람의 생애에 위기가 닥쳐 그대가 조언이나 권면을 주고자 할 때, 그대의 말은 선을 위한 감화를 끼치되 평소에 그대 자신의 모본과 정신이 그대를 위해 확보해 놓은 정도만큼만 끼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선하게 되어야 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겸허하고 순수하고 부드러워지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감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대에게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생애 하는 것이 마치 장미 덩굴이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포도나무가 자색 포도송이를 맺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MB 127.3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영광의 소망”이 되시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살피며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는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도와주고 축복하고 구원하는 것이 그대의 목적이 될 것이다. 잘못한 사람들을 취급할 때,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라디아서 6장 1절)는 말씀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 역시 여러 번 잘못을 범했다는 것과 한번 바른 길에서 떠나게 되면 다시 그 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할 것이다. 형제를 더욱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지 않고 대신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그의 위험을 알려 주게 될 것이다. MB 128.1

갈바리의 십자가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구주께서 그 곳에 달리셨음을 생각하고 그의 죄악의 정도를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해서 헤아려 보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지 않을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이나 자만의 정신이 있을 수 없다. MB 128.2

잘못을 범한 형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체면은 물론 생명이라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비로소, 그대는 눈에서 들보를 빼고 형제를 도와줄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제서야 형제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를 감동시킬 수 있다. 어떤 사람도 책망과 비난 때문에 그릇된 처지에서 돌이킨 적은 없다. 도리어,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떠나고, 마음을 걸어 잠근 채 회개하지 아니하였다. 유순한 정신과 친절하고 마음을 끄는 행동이 실수한 사람을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가리워 줄 수 있다. 그대의 품성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대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주게 될 것이다. 매일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나타나시게 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대를 통해 당신의 말씀이 가진 창조의 능력, 곧 우리 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다른 영혼들을 재창조해 줄, 온유하고 설득력 있으면서도 강력한 감화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MB 1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