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지 화잇 자서전
산업 실험
그 땅이 남양주 연합회의 완전한 소유가 된 시각부터 개교까지에는 할 일이 매우 많았다. 땅을 평탄케 하고, 습지의 물을 빼내야 하고, 과수를 심고 건물을 세워야 하였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하루 여섯 시간씩 일하며 식사를 제공받고, 두 과목의 강의를 듣기를 기뻐한 건장한 젊은이들이었다. 이 학교는 1895년 3월6일에 시작하여 서른 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LS 357.2
이 작업에 종사하는 20명의 청년들의 숙소로서 쿠란봉에 있는 낡은 호텔을 임대했고, 이 건물 옆에 여러 동의 천막을 쳤다. 학교 사업을 위한 재무이자 경영 관리인으로 선출된 메트카프 헤어 형제가 4월에 가족과 함께 쿠란봉으로 이사왔고, 공사장에 좀더 가까이 있기 위해 제재소와 학교 건물 부지로 선정해 둔 곳에서 좀 떨어진 건물 부지 근처에 천막을 세웠다. 거의 2년 동안, 양철 지붕으로 덮은 천막이 그의 거주지가 되었다. LS 357.3
자녀를 그 학교에 보내기를 원하고 있던 많은 부모들은, 학교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대도시들 중 한 곳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시드니나 멜버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30-40에이커의 땅이 뉴캐슬 근처의 황량하고 넓은 부지보다 훨씬 낫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땅이 너무 박토이므로 경작한다 해도 소출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장소를 반대하였다. 화잇 여사는 그 땅의 가치에 대해 보다 고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후원자들이 기부한 5,000 달러로 부지대금을 지불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 땅이 우리의 소유가 된 것을 알았을 때, 나의 가슴은 감사로 약동하였다. 나는 그토록 좋은 장소를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찬양하며 외치기를 원하였다.” LS 358.1
1895년 7월에 화잇 여사는 약간의 땅을 사서 쿠란봉에 거처를 마련함으로 학교 사업에 대한 관심과 아본데일 부지에 대한 확신을 표명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66에이커의 땅을 택하였고, 몇 주일 내에 그녀가 ‘서니사이드’라 명명한 그 땅에서 천막을 치고 가정 생활을 시작하였다. 방이 여덟 개 있는 단층집 건축이 시작되었고, 땅을 개간하자마자 땅을 갈고 과수들을 심었다. 이 경험을 화잇 여사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LS 358.2
“집의 기초가 놓였을 때,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주님께서는 쿠란봉 주위의 빈곤이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이는 부지런하면 토양은 경작될 수 있고 인간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그 소출을 내기 때문이다. LS 358.3
아본데일 토지를 개량하려는 화잇 여사의 무한한 열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주었다. 그는 학교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과수를 심기 위해, 시간은 조금도 허비하지 말 것을 특별히 당부했으며, 일 년전 울창한 유칼립투스 숲을 이루었던 알맞은 땅 일부에 10월경 특상품 과수 일천 그루가 심겨졌을 때 화잇 여사는 무척 기뻐하였다. LS 359.1
11월에 실업 학교가 끝난 뒤, 구체적 진보 없이 여러 달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민 집단을 여전히 흔들고 있는 재정적 불황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황량한 오지에 학교를 세우는데 대한 비판이 더욱 더 널리 확산되었다. 그 때에, 학교가 질질 끌려 다녔던 한 소송에서 법무관의 성급한 판결로 불리한 결말이 났는데, 이로 인해 그 사업에 심각한 지연을 초래한 것 외에도 이천 달러를 잃었다. LS 359.2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사업은 호전될 기미가 전혀 없이 정지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때라도 이천 달러를 잃으면 크게 실망될 터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그 같은 일을 당하는 것은 매우 낙심천만한 일이었다. LS 3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