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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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장 훈련

아이가 먼저 배워야 할 한 가지는 순종의 공과이다. 아이가 충분히 도리를 분별할 만큼 나이를 먹기 전에도 순종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는 노력으로 이 습관이 굳어지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가 자라나서 권위와의 충돌로 인해 생기게 되는 부모와 교사에 대한 많은 거리감과 분노, 또는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일체의 권위에 반항하는 일 등은 대체로 방지될 것이다. Ed 287.1

훈련의 목적은 아이가 자신을 관리할 수 있도록 훈도하는 데 있다. 아이는 독립심과 자제력을 배워야 한다. 아이가 사물을 이해하게 되면, 즉시 그 이성을 순종의 편으로 가담하게 한다. 아이를 대하는 모든 태도에서, 순종하는 것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도록 한다. 모든 사물은 규칙아래 있고, 그 규칙을 순종치 아니하면 결국은 불행과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아이들이 깨닫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고 하실 때에는 우리를 손해와 실패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불복종의 결과를 경고하시는 것이다. Ed 287.2

부모와 교사는 하나님의 대표자이며 그들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행동을 보이면서 가정과 학교의 규칙은 바로 하나님의 규칙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깨닫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부모와 교사에게 순종하듯이 부모와 교사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Ed 287.3

교사와 부모들은 아이들의 발달이 부당한 간섭으로 인해 방해 받지 않도록 지도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너무 간섭하는 것은 방임하는 것과 같이 유해한 것이다. 아이의 “의지를 억압” 하려는 것은 무서운 잘못이다. 사람의 마음은 각각 다르게 되어 있다. 혹 강제로 표면적인 복종은 시킬 수 있을지라도, 그 결과는 아이들의 반항심을 더욱 거세게 하는 것이다. 설령 부모나 교사가 아이를 자기의 의사대로 만들 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가 아이에게 유해하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다. 지혜가 생길 나이에 이른 사람을 훈련하는 일은 말을 못하는 동물을 훈련하는 것과 달라야 한다. 동물은 오로지 그 주인에게 순종하는 일만을 배운다. 동물에게 있어서는 그 주인이 마음이요 판단력이요 의사인 것이다. 어떤 때에는 이 방식을 아이들의 훈련에 사용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이는 기계 인형과 다름이 없게 된다. 사고, 양심, 의지 등은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라도 이렇게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사람의 개성을 약화시키거나 소멸시키는 자는 그 결과적인 불행을 책임져야 한다. 권위 아래 있을 때에 아이들은 마치 잘 훈련된 병정들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섭만 그치면 힘과 견고한 의지가 부족한 성품이 드러나고 만다. 자제력을 배운 적이 없는 청소년들은 부모나 교사의 간섭 이외에는 어떤 속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모나 교사의 간섭이 없게 되면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방종에 흘러, 필경에는 몸을 망치는 일이 허다하다. Ed 288.1

학생에 따라서는 다른 학생보다 의지가 약한 경우도 있으므로. 교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순종하기 쉬운 요구를 해야 한다. 의지는 지도하여 길러 주어야 하는 것으로서, 이를 무시하거나 굴복시킬 것이 아니다. 의지의 힘을 저축하도록 한다. 그것이 인생의 싸움에 필요한 것이다. Ed 288.2

모든 아이들은 참된 의지력을 이해해야 한다. 이 선물에 포함된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야 한다. 의지는 사람의 성질에 있어서 지배하는 힘이요,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은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 (수 24:15) 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은 하나님 의지의 편에 자기의 의지를 순종 시킬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힘에 결합시켜, 어떤 경우에라도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모든 청년과 아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실한 품성을 형성하고 유익한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Ed 289.1

이런 가르침으로 아이들의 자제력을 훈련시키는 부모와 교사는 가장 유용하고 항구적인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표면만을 보는 사람은 그 일을 최상의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 아이의 마음과 의지를 절대적인 권위 아래 눌려 있게 하는 것처럼 당장에 높이 평가 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 우수한 교육법의 성과는 후일에 가서 나타날 것이다. Ed 289.2

현명한 교육자는 학생들을 대할 때 신뢰감과 명예심을 나타내는 일에 노력해야 한다.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은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아이들일지라도 대부분은 높은 명예심을 갖고 있고, 신뢰와 존경을 받고 싶어한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들어가거나 나가거나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지 말라. 미심쩍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기를 꺾고, 도리어 방어하려는 해악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무슨 나쁜 짓을 하지 않았나 하고 언제나 감시하는 대신, 교사는 학생들과 접촉하여, 그들이 멋모르고 저지른 행동들을 분별하여 더 이상 나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잘 계몽해야 한다. 청소년들은 자신이 신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면 대개는 자기가 그 신뢰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Ed 289.3

이와 같은 원칙으로, 명령하는 것보다는 부탁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부탁받은 학생은 자신이 올바른 원칙에 충실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의 순종은 강제적인 것이 아닌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Ed 290.1

교실을 관리하는 규칙은 되도록이면 학교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라야 한다. 거기에서 행하는 모든 원칙은 학생들 앞에서 그 공정성을 확신케 한 연후에 시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학생들은 자기들이 협력하여 만든 규칙들이 준수되는 여부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Ed 290.2

규칙은 수효를 적게 하고 심사 숙고한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한번 결정된 것은 그대로 이행하여야 한다. 변경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 사람의 마음은 이를 승인하고 순응하게 되지만, 자행 자지 (自行自止)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면 요구하고 희망하고 반신 반의하는 마음을 품어 불온과 조급성과 불복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Ed 290.3

하나님의 통치에는 악과의 타협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불복종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아이의 행복을 원하는 부모나 교사는, 아이들이 권위를 무시하고 순종치 않으려고 핑계를 대고 교활한 수단으로 고집스런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것에 타협해서는 안 된다. 나쁜 행위를 좋게 취급하거나, 비위를 맞추거나, 물건을 가지고 마음을 사서 말을 듣도록 하거나, 교환 조건을 수락하는 일 등은 사랑이 아니라 감상이다. Ed 290.4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 (잠 14:9) 긴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죄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죄가 사람에게 끼치는 힘은 무서운 것이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잠 5:22). 아이들이 나쁜 습관에 사로잡히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그들에게 최악의 해를 끼치는 것이다. Ed 291.1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유를 원한다. 이 측량할 수 없이 큰 축복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데서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하여야 한다. 율법이야말로 참된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이 타락하고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을 지적해 내어 이를 금하고, 율법을 좇는 자를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 Ed 291.2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시 119:45, 24) 라고 하였다. Ed 291.3

악을 시정하는 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허물을 찾거나 견책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견책으로 시정하려 하면 올바르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나빠지게 된다. 사람들, 특히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무정하게 비판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 시들게 하는 바람 앞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Ed 291.4

어떤 특별한 결점으로 견책만 받은 아이는 그 결점을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는 고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리하여, 그 실망과 낙담을 흔히 무관심과 대담한 척하는 허세로 감추려고 한다. Ed 291.5

책망의 참된 목적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의 과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의사를 가질 때라야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이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에는, 용서와 능력의 근원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본인에게 자존심을 갖게 하고, 용기와 희망을 북돋울 것이다. Ed 291.6

이 일은 사람에게 맡겨진 가장 훌륭하고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 일에는 탁월하고 교묘한 지혜와 섬세한 감수성, 인간성에 대한 지식과 하늘이 주는 믿음과 인내, 또한 자원하여 일하고 주목하며 기다려야 할 것 등이 요구된다. 이 일이야말로 어떤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Ed 292.1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아이나 청년들을 감정적으로 대하면 분노를 일으킬 뿐이다. 부모나 교사들이 참을 수 없어 지혜롭지 못한 말이 입에서 나갈 위험이 있을 때에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다. 침묵에는 기이한 능력이 있다. Ed 292.2

교사는 냉정한 마음이나 고집스러운 성질을 가진 학생들을 만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을 대하는 중에, 교사는 자기 자신도 옛적에는 훈련을 필요로 하는 아이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령이나 교육이나 경험에 있어서 더 높은 위치에 있는 현재에도 흔히 잘못을 저지르고, 자비와 관용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청소년들을 훈련시킬 때, 교사는 그 학생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악으로 향하는 경향을 가진 인간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든지를 다 배워야 할 아이들로서, 그 중에는 어떤 것에 대하여는 특별히 깨우치기를 힘들어 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잘하지 못하는 학생을 교사는 참을성 있게 지도해야 하며, 더디 아는 것을 책망하지 말고 항상 격려해 주어야 한다.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인 학생에게는 매우 유순하게 대해야 한다. 교사는 자기 자신도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곤란과 싸우고 있는 학생에게 끊임없는 동정심과 인내를 보여 주어야 한다. Ed 292.3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청소년들의 교육에 책임 있는 사람들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하나님 가족의 어린이들이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은혜를 이을 자들이다. 아무리 머리가 둔하고 나이가 어리고 매일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법칙은 신성히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Ed 292.4

이 법칙을 아는 교사는 되도록이면 학생의 과실과 결점을 공개하는 일을 피할 것이다. 교사는 다른 학생들 앞에서 견책이나 처벌을 하지 말아야 하며, 학생이 개심하도록 자기의 모든 노력을 다할 때까지는 그를 퇴학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학생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는 동시에 권위에 반항하고 이를 무시하며 학교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의 영향이 다른 학생들에게까지 오염되는 것이 분명할 때에는 퇴학 처분도 필요하다. 불명예스러운 퇴학 처분이 공개됨으로 완전히 자포 자기가 되어 파멸에 이르는 학생이 많이 있다. 부득이 제명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도, 대개는 이를 공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모와 의논하고 협력하여, 교사가 개인적으로 학생의 퇴학을 취급하도록 해야 한다. Ed 293.1

청년들에게 특별히 위험한 이 시대의 유혹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이 유혹의 조류에 흘러 떠내려가기는 쉬우나,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유혹에 시험 당하는 모든 청소년들을 위하여 학교는 “도피성” 이 되어야 하며, 이곳에서 그들의 우둔한 행위는 참을성 있고 현명하게 취급되어져야 한다. 책임을 자각하는 교사라면 제멋대로이고 불순종하는 학생들을 잘 지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나 그들 마음과 생활에서 끊어 버려야 한다. 사랑과 친절, 인내와 자제는 언제나 이런 교사의 언행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정의는 자비와 긍휼을 포함한다. 견책이 필요할 때에는, 말을 너무 크게 하지 말고 낮은 목소리로 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부드럽게 그 잘못한 점을 보여 주고, 개심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참된 교사는, 실수할 바에는 차라리 가혹한 쪽보다는 자비를 베푸는 쪽에서 실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야 한다. Ed 293.2

개심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청소년들의 마음은 표면에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완고하지는 않다. 절망적인 사람도 현명한 훈육으로 개심되는 수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친절한 대접 앞에서 가장 빨리 마음이 녹는다. 교사는 유혹당하고 있는 학생에게서 신뢰를 얻도록 하고, 그 학생의 미점 (美點) 을 인정해 주어 발달시킴으로 학생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교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d 294.1

하늘로부터 오신 교사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죄과를 모두 참으신다. 그분의 사랑은 냉각되지 않고, 그들을 구하려는 그분의 노력은 중단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과실을 범한 자, 반항하는 자, 심지어는 배교한 자에게까지도 몇 번이라도 다시 받아들이시기 위하여 손을 펴고 기다리신다. 그 분께서는 난폭한 취급을 받고 있는 무력한 아이를 보시고 마음 상해 하신다.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의 부르짖음은 그분의 귀에 결코 헛되이 울리지 않는다. 그분의 눈에는 누구나가 다 소중하지만, 난폭하고 우울하고 고집스러운 아이는 더욱 예수님의 사랑과 동정심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대개, 예수님께서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찾아보신다. 가장 유혹에 빠지기 쉽고 가장 과실을 범하기 쉬운 자일수록 그분의 강한 염려의 대상이 된다. Ed 294.2

부모와 교사들은, 고민하고 고통받고 시험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신 예수님의 속성을 품어야 한다.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 어야 하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 기 때문이다 (히 5:2). 예수님께서 우리를 과분하게 대접하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남을 잘 대접해야 한다. 부모든 교사든 예수님께서 쓰신 것과 같지 않은 방법을 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Ed 2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