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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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과 위클리프

위클리프는 로마 법왕의 침략적 세력에 대항하여 영국 국왕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다시 부름을 입었다. 그는 국왕의 사신이 되어 네덜란드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법왕의 사절들과 회의를 하였다. 거기서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승려들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들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영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장래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많이 배웠다. 이 법왕권의 대표자들을 통하여 그는 그 교직 정치 (敎職政治) 의 참된 성격과 목적을 알았다. 영국에 돌아간 후에 그는 종래의 가르침을 더욱 담대하게 되풀이하였고, 더욱 큰 열성으로 탐욕과 교만과 기만이 로마교의 신 (神) 이라고 공언하였다. GC 84.3

그는 자기가 저술한 소책자에서 법왕과 법왕의 모금자 (募金者)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비를 빼앗고, 해마다 수천 마르크의 돈을 성직 매매의 저주받은 이단에 불과한 성물과 신령한 행사를 위하여 빼앗아 가며, 모든 그리스도국으로 하여금 그 이단을 찬동하고 지지하도록 만든다. 참으로 우리나라에는 금으로 된 거대한 산이 있는데 지금껏, 그것을 가져가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저 교만하고 세속적인 신부라는 모금자가 가져가고 있으므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산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나라에서 돈은 가져가고 성직 매매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만을 남겨 놓기 때문이다” (John Lewis, History of the Life and Sufferings of J.Wycliffe, p.37). GC 85.1

위클리프가 영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는 칙명 (勅命) 으로 루터워드의 교구장 (敎區長) 이 되었다. 이 사실은 적어도 국왕이 그의 솔직한 말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위클리프의 감화는 긍정의 태도를 결정하고 국민들의 신념을 형성하는 일에 영향을 미쳤다. GC 85.2

그러나 곧 법왕의 진노와 위협이 그에게 다가왔다. 대학과 국왕과 감독들에게 보내는 세 가지 교서가 영국으로 급히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모두 그 이단의 교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이었다 (부록 14 참조) (Augustus Neander,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period 6, sec.2, pt.1, par.참조). 이 교서가 하달되기 전에 이미 감독들은 격분한 나머지 위클리프를 법정으로 소환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가장 세력 있는 두 왕족이 그를 동반하여 법정에 임석하였고, 군중들이 법정 밖을 에워싸고 마침내 법정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소동까지 일으켰으므로, 재판을 진행하던 법관들도 이를 두려워하여 심문을 잠깐 중지하고 그를 놓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감독들이 나이 많은 에드워드 3세로 하여금 그 개혁자를 배척하도록 하고자 꾀하였으나 얼마 후에 그 왕은 죽고, 전에 위클리프를 보호하던 이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GC 85.3

그러나 교서가 도착되자 이단자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라는 엄한 명령이 온 영국에 선포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분명히 화형주 (火刑柱) 를 의미하였다. 위클리프는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로마의 보복의 희생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옛날의 노독 중의 한 사람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 (창 15:1) 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손을 펴사 당신의 종을 보호하셨다. 죽음이 다가왔으나 그 죽음은 개혁자에게가 아니고 도리어 개혁자에게 죽음을 선고한 법왕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레고리우스 Ⅱ세는 죽었다. 그러므로 위클리프를 심문하기 위하여 모였던 교직자 (敎職者) 들은 부득이 산회할 수밖에 없었다. GC 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