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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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장 — 청교도와 신교의 자유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종교계의 형편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교의 교리는 버렸을지라도 그 교리의 여러 가지 형식은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로마교의 권위와 신조는 부정되었을지라도 그 관습과 의식은 영국 교회의 예배에 적지 않게 혼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며, 성경에 특별히 명령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되었다. 또 그들이 그와 같은 것들을 지킴으로 로마교와 개신교와의 간격을 좁히는 동시에 로마교로 하여금 신교를 받아들이기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해석되었다. GC 289.1

보수적이요 타협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논증들이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관습을 그대로 지키게 되면 “로마교와 종교 개혁파 사이에 생긴 깊은 구덩이에 다리를 놓는 것과 같은 것” (Martyn, vol.5, p.22) 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단연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의식들을, 거기에서 해방된 후 다시 되돌아갈 마음조차 없는 노예 제도의 휘장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예배에 관한 규칙을 정하여 주셨으므로 사람들이 거기에 더하거나 감할 자유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큰 배교의 발단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교회의 권위를 첨가하려고 시도하는 데 있었다. 로마교는 하나님께서 금하지 아니한 것을 하라고 명령함으로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을 금지함으로 끝을 맺었다. GC 289.2

많은 사람은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던 순결과 단순성으로 돌아가고자 열망하였다. 그들은 영국 교회가 세운 대부분의 관습들을 우상 숭배의 유물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영국 교회의 예배에 연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회는 국가의 권력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교회의 의식에 반대하는 일이 용납될 수 없었다. 예배에 출석하는 일은 법률로써 요구되었으며, 허가 없이 종교적 예배를 위한 집회를 여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고, 그것을 범하는 자는 투옥, 추방, 사형 등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GC 290.1

17세기의 초엽에 영국의 한 왕은 즉위하자마자 청교도들을 복종시키든지 괴롭혀 그 땅에서 내쫓든지 혹은 그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게 하든지 하겠다는 자신의 단호한 결심을 표명하였다 (Georgr Bancroft,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t.1, ch.12, par.6). 수색당하고, 추방당하고, 박해를 받은 그들은 그들의 장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을 바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면 “영국은 이미 영구적으로 거주할 만한 곳이 되지 못 한다” (J.G.Palfrey, History of New England, ch.3, par.43) 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어떤 사람들은 마침내 네덜란드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결심하였다. 그들은 어려움과 손실과 투옥 등을 당하였다. 결국 그들의 목적은 좌절당하고, 그들은 원수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참고 견딘 결과로 마침내 그들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호적인 영접을 받게 되었다. GC 2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