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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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의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의 도피와 함께 일반적인 쇠퇴가 프랑스를 엄습하였다. 번화하던 생산 도시는 타락한 도시로 전락되고, 비옥하던 지방은 원시적인 황무지로 바뀌고, 이상한 진보를 보인 기간 후로 지적 부진과 도덕적 퇴폐가 계속되었다. 파리는 하나의 거대한 구빈원 (救貧院) 이 되었으며, 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에 약 20만 명의 거지들이 왕의 손으로 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제수이트 당원들만은 쇠퇴하여 가는 나라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교회와 학교와 감옥과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에서 무서운 독재를 행사하였다. GC 279.2

프랑스의 성직자들, 왕, 입법자들의 수완으로도 어쩔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온 나라가 무정부 상태와 파멸로 들어가게 만든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복음이 가져다 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백성들은 구주께서 가르쳐 주신 자아 희생과 무아 (無我) 의 사랑의 귀한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극기를 실행하지 않게 되었다.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여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고,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고역과 압박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부요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은 더욱 극심하고 억압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나타난 귀족들의 탐욕과 방탕은 농민들을 약탈하고 착취하기에 이르렀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미워했다. GC 279.3

많은 지방에서 토지들은 귀족들이 차지하였고, 노동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소작을 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주의 자비에 의존되었고, 그들의 지나친 요구에도 복종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교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은 중류와 하류 계급에서 부담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집권자와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세가 부과되었다. “귀족들은 쾌락을 제일로 생각하였고, 농부들이 굶어 죽는 것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다. …백성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주의 전적인 이익을 도모하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부들의 생활은 실로 끊임없는 수고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들이 불평을 말하면 그것은 오만한 모욕으로 취급되었다. 법정에서는 언제나 농민들의 호소보다는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일반 사회의 제도가 부패됨으로 말미암아 귀족들의 변덕스러운 주장이 법률과 같은 힘을 갖게 되었다. 평민들은 한편으로 세속적 권력자에게,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바치게 되었는데, 그 세금의 절반도 왕실이나 교회의 금고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 돈의 나머지 부분은 방탕한 자아 방종에 낭비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자기들의 동족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그 사람들은 오히려 납세를 면제받고, 국가의 법률과 관례에 따라 여러 가지 중직에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와 같은 특권계급의 사람들은 약 15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절망적이며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록 22 참조). GC 2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