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이들
종교개혁의 확산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지적하고 나서서 개혁 사업에 착수한 것은 위클리프의 저술 때문이었다. 후스는 위클리프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며 학식이 있고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정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성경에 대한 호소와 신부들의 야비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대담하게 꾸짖은 것이 널리 관심을 불러일으켜 수천명이 기쁜 마음으로 이 순수한 믿음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법왕과 승정(僧正)과 신부와 수도승(修道僧) 등의 분노를 일으켜 후스는 이단 혐의에 답변하라고 콘스탄스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소환되었다. 독일 황제는 그에게 안전 통행권을 주었으며 그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 법왕은 친히 그에게 어떤 불공정한 일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하였다. SR 337.3
후스는 진리를 옹호하여 장시간 심문을 받은 끝에 그가 주장하는 교리를 취소하든지 혹은 죽음을 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순교자의 길을 택하였다. 자기의 서적이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을 본 후에 자기 자신도 화형을 당했다. 교회와 국가의 고위층 앞에서 하나님의 종은 법왕권의 부패에 대하여 엄숙하고 충실하게 항의하였다. 가장 엄숙하고 공공연하게 안전을 보장하겠다던 그 약속을 뻔뻔스럽게도 저버리고 후스를 처형한 것은 온 세상에 로마교회의 표리 부동한 잔인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진리의 원수들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실제로는 그들이 무익하게도 파멸시키려고 애쓰던 사업을 도와주는 격이 되었다. SR 338.1
핍박의 불길 속에서도 널리 성행하고 있는 종교적 신앙의 부패에 대한 조용하고 헌신적이고 간절하고 참을성 있는 항의는 위클리프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도 시대의 신자들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세상 재물을 자원하여 바쳤다. SR 338.2
법왕권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려고 분투 노력하였으나 법왕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공언하면서도 생애가 너무도 부패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였다. 인쇄기의 발명으로 성경이 더 널리 배포되어 많은 사람들이 로마교회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SR 338.3
한 증인이 자기가 가진 진리의 횃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때에 다른 증인이 그의 손에서 떨어진 봉화를 다시 받아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봉화를 높이 쳐들었다. 개인과 교회와 국가를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백년이란 기간을 건너서 사람들은 위클리프 시대의 롤라드교도의 손을 붙잡고자 저희의 손을 내밀었다. 루터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칼빈은 불란서에서, 츠빙글리는 스위스에서 복음을 전했다. 세상은 여러 세기의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 때에 이 나라 저 나라에서는 “종교 자유”라는 신비한 단어가 울려 퍼졌다. SR 3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