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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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탕 자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나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에 넘치는 사랑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갔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행한 처지에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원수의 시험을 받을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과 부드러운 동정심을 나타내시는 분이다. COL 198.1

탕자의 비유 가운데는 일찍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다가 마귀를 용납하고 그의 뜻에 사로잡힌 자들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처리 방법이 나타나 있다. COL 198.2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 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갔다. COL 198.3

이 둘째 아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하고 그는 자기의 기분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였다. COL 198.4

이 청년은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대한 감사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아들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특권만을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 몫으로 받게 될 유산을 지금 받기를 원했다. 그는 현재의 낙을 누리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장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COL 199.1

그는 부모에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 집에서 떠나 “먼 나라”로 갔다. 돈을 넉넉히 가지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 이 젊은이는 자기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 곳에는 그렇게 하면 네게 해가 될 터이니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거나 이것이 옳은 일이니 이 일을 하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악한 동무들은 그로 하여금 더욱 큰 죄에 빠지도록 부추겼다. 그리하여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물을 허비”하였다. COL 199.2

성경에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롬 1:22) 된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있는 데 이 말씀이 바로 비유 중에 나오는 탕자의 경력(經歷)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이기적인 목적으로 달라고 해서 받은 재물을 오입하는 일에 다 허비해 버렸다. 그의 귀중한 청춘이 그러한 일에 허송되었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와 지력(智力)과 젊은이의 유망한 전도와 영적 포부 모두가 다 정욕의 불꽃에서 소멸되었다. COL 199.3

큰 흉년이 들자 그는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지방 사람에게 얹혀살게 되었고 그의 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유대인에게는 이 일이 몹시 천한 직업이었다. 한때 자기가 자유롭게 되었다고 뽐내던 이 젊은이는 지금에 와서 자기가 노예가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죄의 줄에 매인”(잠 5:22) 것이다. 즉 최악의 노예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를 매혹시키던 찬란하고 번쩍거리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 와서는 속박의 쇠사슬의 무게에 눌리게 되었다. 돼지 외에는 다른 아무 친구도 없는 쓸쓸하고 흉년이 든 그 지방에서 그는 땅 위에 홀로 앉아 짐승이 먹는 팥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 그가 잘 살 때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돈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던 친구들 중에 그의 친구로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허랑방탕하며 즐기던 오락은 이제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는 전에 자기의 양심을 달래고 감각을 마비시키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배도 고프고 그의 자만심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도의심은 위축되고 의지력은 약해져서 믿을 수 없게 되고, 그의 고아(高雅)한 정서는 거의 마비되어 인간 중에 가장 가련한 자가 되었다. COL 200.1

여기에 묘사된 죄인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한가! 비록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둘러싸여 살지만 방종과 죄악적 쾌락에 몰두하는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는 것만큼 바라는 것은 없다. 죄인은 감사하지 않은 탕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을 마치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권리로 생각하고 주장한다.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감사도 돌리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사랑의 봉사도 하지 않는다. 가인이 자기의 살 곳을 찾기 위하여 여호와 앞을 떠나간 것처럼, 또는 탕자가 “먼 나라”로 떠나간 것처럼 죄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롬 1:28). COL 200.2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자신을 중심으로 사는 모든 생애는 낭비하는 생애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자 하는 자는 재물을 낭비하는 자이다. 그는 귀한 세월을 허비하고 정신과 마음과 심령의 능력을 낭비하고 영원한 복락을 얻는 일에 낙오자가 된다. 자신을 섬기려고 하나님을 떠나가는 사람은 재물의 종이 된다. 천사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마음은 세속적이고 추잡한 것을 섬기는 데까지 타락되었다. 이것이 자기 중심주의자가 맞이하는 종말이다. COL 200.3

그대가 이러한 생애를 선택했다면 그대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허비하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에게는 타락한 그대 자신을 깊이 자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대는 먼 나라의 외로운 처지에서 그대의 가련함을 느끼고 절망 가운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선지자의 말에 포함된 다음의 말씀은 만민이 인정하는 진리이다.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 6).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그러나 사람이 햇빛과 비를 안 맞으려 하면 안 맞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의로운 해가 비칠 때나, 은혜의 비를 만민에게 값없이 주시는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감으로 “광야 간조한 곳…에 거하”게 될 수 있다. COL 201.1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도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선택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는 아직도 그러한 사람을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감화를 끼치고 계시다. 가련한 형편에 빠진 탕자는 “스스로 돌이”켰다. 사단이 그에게 행사한 기만적 세력은 깨어졌다. 그는 자기의 고생은 자기의 어리석음의 결과임을 깨닫고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말한다. 탕자는 비록 가련한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강권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보증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롬 2:4)신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은 금쇠사슬이 되어 위기에 처해있는 모든 영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주께서는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고 말씀하셨다. COL 202.1

그 아들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그러고는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는 자기가 그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너무나 좁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부언한다. COL 202.2

이 젊은이는 돼지 떼와 팥 껍질을 버리고 자기의 집을 향하여 떠난다. 그는 허약해서 비틀거리며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몸으로 결연히 자기의 길을 떠난다. 그는 자기의 누더기를 가릴 옷이 하나도 없다. 그의 가련한 신세가 그의 교만을 꺾었다. 본래 아들의 신분이었던 그가 종의 직분을 얻으려고 급히 달려간다. COL 202.3

놀기만 좋아하고 생각이 모자랐던 그 젊은이는 부친의 집을 떠날 때 부친의 마음속에 남겨 놓은 고통과 자식에 대한 연민을 조금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그의 방탕한 동무들과 춤추고 먹고 마시고 있을 때는 그의 고향집에 드리운 우울함에 대하여 거의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피곤하고 무거운 발을 끌면서 고향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에도 한 분이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 “상거가 먼데”도 그의 부친은 아들의 모습을 분간했다. 사랑은 눈을 밝게 한다. 여러 해 동안의 죄된 생애로 초췌해졌을지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눈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몰라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사랑의 팔로 그의 “목을” 오랫동안 꼭 “안”고 있었다. COL 203.1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가정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아들이요 수종하는 남녀종들의 존경과 섬김을 받아야 할 아들이었다. COL 203.2

부친은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하였다. COL 204.1

침착성이 없던 청년 시절에 탕자는 자기 부친을 엄격하고 가혹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자기 부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얼마나 다른가? 이와 같이 사단에게 속임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가혹하고 각박한 분으로 본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치 저희를 비난하고 정죄하려고 어떤 꼬투리를 잡으려는 분으로 보며 저희를 도와주실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죄인을 받아 주려 하지 않는 분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그것을 벗어던지면 좋을 무거운 멍에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을 긍휼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은 그에게 전제적이고 무자비한 분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회개하는 당신의 자녀를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아버지로 보인다. 죄인은 시편 기자와 같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 (시 103:13)도다라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COL 204.2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조소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 그 아들은 자기의 과거가 용서함을 받고 잊어버린바 되었으며 영원히 그의 죄가 도말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죄인에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사 44:22),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렘 50:20)라고 하신다. COL 204.3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독자들이여, 그대들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방황했는가? 그대는 죄악의 열매를 먹으려 하다가 결국에 그것이 그대의 입술에서 재가 되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 그대는 그대의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 버리고, 그대의 일생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대의 소망이 끊어진 채 외롭고 쓸쓸하게 앉아 있지는 않는가? 오랫동안 그대에게 속삭였으나 그대가 듣기를 원치 않던 다음의 음성이 다시 분명하고 똑똑한 어조로 그대에게 임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미 2:10).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는 그대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고 초청하신다. COL 205.1

그대는 자기 자신을 개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 될 만큼 충분히 선한사람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다고 속삭이는 원수(마귀)의 말을 듣지 말라. 만일 그대가 그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대는 결코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사단이 그대의 더러운 옷(품성)을 가리키며 그런 말을 할 때에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하는 예수의 약속을 암송하라. 원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말하라. 다음의 다윗의 기도가 그대의 기도가 되게 하라.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COL 205.2

일어나서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그리하면 그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대를 영접하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딛는다 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그대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트는 그 순간에 그분은 그것을 아신다. 기도가 아무리 더듬거리고 눈물을 아무리 은밀하게 흘릴지라도 그분은 아시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마중 나가지 아니하시는 때는 없다. 기도가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마음의 소원이 알려지기도 전에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은혜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는 은혜를 만나기 위하여 나온다. COL 206.1

그대의 천부께서는 죄로 더럽혀진 옷을 그대에게서 벗기실 것이다. 스가랴서의 아름다운 비유적 예언 속에서 여호와의 천사 곁에 선 누추한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죄인을 대표한다. 주께서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슥 3:4, 5)히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 (사 61:10)으로 그대를 입히실 것이고, “의의 겉옷”으로 입히실 것이다.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시 68:13). COL 206.2

주께서 그대를 인도하여 잔치하는 집에 들어가리니 그대 위에 세운 그 기(旗)는 사랑이 될 것이다(아 2:4). 주께서는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 (슥 3:7)면,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주의 보좌를 호위하고 있는 거룩한 천사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COL 206.3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5), “하나님 여호와가…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리고 하늘과 땅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는 아버지의 기쁨의 노래에 맞추어 합창하게 될 것이다. COL 207.1

구주의 비유 가운데서 지금까지는 이 기쁜 장면의 화음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이 없었으나 이제 주께서는 이와는 성질이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신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며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였다. 이 형은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자기 부친의 염려를 나누지도 아니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처럼 잃었던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도 않았다. 기뻐하는 노래 소리는 그의 마음에 아무런 즐거움을 주지도 못했다. 그는 한 종에게 그 잔치의 까닭을 물었고 종의 대답은 그로 몹시 질투하게 만들었다. 그는 잃었던 동생을 만나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탕자를 후대하는 것이 자기를 모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COL 207.2

그의 부친이 나와서 그를 달랠 때에 그의 교만과 악의가 드러났다. 그는 자기 아버지 집에서의 자신의 생활을 보수 없이 일한 봉사의 쳇바퀴 생활로 논한 다음 그 사실을 방금 돌아온 동생에게 베풀어진 호의와 비교했다. 그는 이때까지의 그의 봉사는 아들로서가 아닌, 종으로서의 봉사였다는 것을 밝히 드러냈다. 자기 아버지 앞에서 일하는 것을 영구적인 기쁨으로 생각했어야 할 그가 자기 근로 생활(勤勞生活) 에서 생기는 소득(所得)만을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가 한 이 말은 단지 그의 근로에 대한 소득을 얻기 위하여 죄악적인 쾌락을 삼가왔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이 동생이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받게 된다면 자기는 맏아들로서 몹시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동생이 후대 받은 것을 시기하였다. 또 형은 만일 자기가 아버지였더라면 그 탕자를 맞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형은 그를 자기의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고 냉정하게 “이 아들”이라고 말했다. COL 207.3

그러나 부친은 부드럽게 그 형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고 말하였다. 네 동생이 방랑 생활을 하던 이 몇 해 동안에 너는 나와 같이 사는 특권이 있지 않았느냐?” COL 208.1

아버지는 자녀들이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그들에게 주고 있었으므로 그 아들은 자기가 받을 선물(유산)이나 부수에 대하여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너는 내 사랑을 믿고 값없이 주는 선물을 받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COL 208.2

한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얼마 동안 가족을 떠나 살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지금 돌아오게 되어 그로 인한 기쁨이 모든 불안한 생각을 일소하여 버렸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또한 얻었”노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COL 209.1

이때에 형은 자기의 비열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정신을 깨달았을까? 그는 자기 동생이 비록 방탕했을지라도 역시 자기의 동생이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맏형은 자기의 시기심과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였을까? 이 점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 비유는 아직도 계속 중이며 그 결과를 청중들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COL 209.2

여기에 나오는 맏아들은 세리와 죄인으로 간주되던 사람들을 업신여기던 그리스도 당시의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과 각 시대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저희 자신이 그다지 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방자들을 저희의 입장에서 논박하셨다. 그들은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은 품꾼의 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에 근거해서 일하지 아니하고 보수를 받을 생각으로 일했다. 저희가 보기에는 하나님은 혹독하게 일을 시키는 주인과 같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증인들에게 당신의 은혜의 선물 곧 랍비들이 수고와 고행(苦行)을 해서 얻으려던 선물을 아낌없이 받으라고 초청하시는 것을 보고 몹시 화가 났다. 부친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케 한 탕자의 귀가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질투심을 일으킬 뿐이었다. COL 209.3

비유 가운데 맏아들에 대한 부친의 권고는 바리새인에 대한 하나님의 부드러운 호소이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그것은 보수가 아니고 선물이다. 그대들은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공로 없이 주시는 그것을 탕자처럼 받기만 하면 된다. COL 209.4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게 할 뿐 아니라 형제들을 냉정하고 비평적인 눈으로 보게 한다. 맏아들은 이기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의 동생의 모든 행동을 비평하고 조그마한 결점에 대해서 비난하고자 늘 엿보고 있었다. 그는 동생의 잘못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변명하려 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이 홍수같이 밀려오는 시험에 맞서 싸우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곁에서 완고하고, 고집스럽고, 불평하고, 비방하는 태도로 방관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칭하지만 실제로는 사단의 정신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자들은 저희의 형제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로 인하여 저희 자신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실 수 없는 자리에 두게 된다. COL 210.1

많은 사람은 끊임없이 이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미 6:6~8), 그러나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신다. COL 210.2

하나님께서 명하신 봉사는 이것이니 곧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사 58:6, 7)이다. 그대 자신이 오직 그대의 천부의 사랑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죄 가운데서 고생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불행을 당한 자와 참회하는 자들을 질투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서 이기심의 얼음이 녹아내리면 그대는 하나님과 같은 동정심을 가지게 되고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 COL 210.3

그대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죽었다가 살았으며…잃었다가 얻”은 자가 “네 동생”이 되어야 한다. 그는 가장 밀접한 끈으로 그대에게 붙들어 매어져야 하는 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아들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일 그러한 아들과의 관계를 부인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가정에 속한 자녀가 아니고 품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COL 211.1

비록 그대가 잃어버린 자를 환영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기쁨은 계속될 것이며 도로 찾는 자는 하늘 아버지의 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하게 될 것이다.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는 바깥 어두운데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대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COL 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