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믿음으로 뿌림
성장 과정의 변화 가운데는 거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교훈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귀한 몇 개의 교훈이 씨의 성장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남녀 노소를 물론하고 누구에게나 교훈을 준다. Ed 104.1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6-28). Ed 104.2
종자는 그 자체에 싹이 트는 기능 즉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신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혼자 내버려 두면 싹을 틔울 힘을 갖지 못한다. 곡물의 생장을 촉진시키는 데에는 사람이 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어떤 단계를 넘어서면 사람으로서는 그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한계점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에서 사람은, 전능하신 힘으로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일과 기이한 관계를 가지신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d 104.3
종자에 생명이 있고 땅에 능력이 있을지라도 만일 거기에 무한한 능력이 밤낮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종자는 수확을 가져 오지 못한다. 메마른 밭이 소낙비로 생기를 회복해야 하며, 햇볕이 온기를 주어야 하고, 땅에 묻힌 씨앗에 전기가 통해져야 하는 것이다. 창조주에 의해서 심어진 생명은 창조주에 의해서만 싹 틔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종자는 싹이 트고 식물은 생장한다. Ed 104.4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 8:11).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 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사 61:11). 천연계와 마찬가지로 영적 파종에 있어서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Ed 104.5
씨를 뿌리는 일은 믿음으로 하는 일이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종자가 싹이 트고 자라나는 신비한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인해 그 곡식이 무성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그는 여러 배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면서 씨를 뿌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모나 교사들은 씨를 뿌릴 때부터 그 수확을 기대하고 수고하는 것이다. Ed 105.1
좋은 종자라도, 일시적으로는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린 흔적이 없고 사람의 눈에 뜨이지도 않은 채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하나님의 영이 심령에 활기를 줄 때에, 그 감추어졌던 씨는 싹을 내고 나중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의 평생 사업은 이것이나 저것 중에 어느 것이 번영할는지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것이 아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전 11:6). 하나님이 주신 크신 약속에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 … 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 8:22) 고 선언되어 있다. 이 약속을 확신하며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우리도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영적 씨를 뿌리는 일에 노력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뢰해야 할 것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사 55:11).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6). Ed 105.2
종자가 싹이 트는 것은 영적 생명의 시작을 나타내고, 나무의 자라남은 품성의 향상을 표현한다. 자라남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나무는 자라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 해야 한다. 식물의 생장과 마찬가지로 품성도 사람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무언 중에 항상 성장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생명이 성장의 각 단계에서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완성될 때에는 그보다 더한 지속적인 성장이 따를 것이다. Ed 105.3
식물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련하신 것을 받아서 자라난다. 이와 같이,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힘과 협력함으로 달성되는 것이다. 식물이 흙에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 마치 식물이 햇빛과 이슬과 비를 받는 것처럼,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그리스도에게 향해 있으면, 성령은 마치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실” (호 6:3) 것이다. 마치 의로운 해처럼 “치료하는 날개 (난외 주) ” (말 4:2) 를 가지고 우리 위에 떠오를 것이며, 우리는 “백합화같이” 필 것이며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호 14:5, 7) 것이다. Ed 106.1
밀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 (막 4:28) 이 된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곡식을 가꾸는 목적은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배고픈 자에게 떡이 되고 다음 수확을 위한 종자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오신 농부 예수님께서도 수확을 기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애 속에 당신을 재생시키고자 노력하신다. 그것은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생애에 재생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Ed 106.2
식물이 종자로부터 서서히 자라나는 것은 자녀 교육을 위한 실물 교훈이 된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고 한 비유를 주신 분이 작은 종자를 만들고, 거기에다 생명력을 불어넣고, 또 그 생장을 지배하는 법칙을 정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로 가르치신 진리를 당신의 생활에서 실현하셨다. 하늘의 주재, 영광의 임금이신 그분께서는 베들레헴에 나셔서 얼마 동안 어머니에게 보호를 받는 무력한 아기로 지내셨다. 어릴 때에 그분께서는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셨으며, 유익한 방법으로 부모의 희망을 실행하셨다. 그러나, 지성이 한 번 깨우쳐진 이후로는 계속하여 은혜와 진리에 대한 지식 속에서 자라나셨다. Ed 106.3
부모와 교사들은, 청소년들이 뜰의 나무들처럼 인생의 각 단계마다 자연히 꽃을 피우고 그 시절에 알맞는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도록 그들의 성벽을 좋은 쪽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목표를 가져야 한다. Ed 107.1
어린이들은 어린이답게 단순하게 교육해야 한다. 그들은 응당 작고 유익한 의무를 이행하고 그들 나이에 알맞는 즐거움과 경험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교육되어져야 한다. 어린 시절은 비유 속에 나오는 싹과 같다. 싹은 그 자체의 특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에게 나이보다 더 성숙하기를 강요하지 말며, 할 수 있는 한 그들이 어린 시절에 가지는 신선함과 아름다운 덕을 길이 간직하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어린이의 생활이 조용하고 단순할수록, 부자연한 자극에서 떠나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질수록 그 지력과 체력과 신령적 힘은 더욱 순조롭게 발달할 것이다. Ed 107.2
그리스도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중에는 수확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설명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천연계의 장막을 젖히시고, 우리들의 유익을 위하여, 언제나 꾸준히 발휘되고 있는 창조력을 나타내 보이셨다. 떡을 여러 배로 더하게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뿌려진 종자를 번식케 하는 일에 날마다 이적을 행하신다. 그분께서 이 세상의 전답에서 수확을 거두시며 무수한 사람들을 늘 먹이시는 일은 일종의 이적이다. 사람들은 곡식을 보호하고 떡을 준비하는 일에 그분과 협력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요구에 응하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들을 자연의 힘이나 사람이 취한 방법의 효과로 돌리며, 그분의 선물을 이기적인 용도를 위해 악용하여 축복 대신에 저주를 받는 일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것들을 고치고자 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둔한 감각이 깨우쳐져서 당신의 자비하신 은혜를 깨닫게 됨으로, 주시는 선물이 당신의 뜻대로 우리에게 축복이 되기를 원하신다. Ed 107.3
종자에 생명을 주는 것은 생명을 나눠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곡식을 먹는 중에 그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받는 일에까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더욱 더 당신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기를 바라고 계신다. Ed 108.1
천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칙을 보면, 원인에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다. 곡식을 거둔다는 것은 먼저 종자를 뿌렸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허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은 혹 동료를 속이고 자기가 한 적이 없는 어떤 봉사 행위에 대하여 찬사와 보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천연계에는 속임수가 있을 수 없다. 불충실한 농부에게는 그 수확이 그의 잘못을 대변한다. 크게 볼 때, 이 사실은 신령적 세계에서도 진리로 나타난다. 악이 성공하는 것은 외양뿐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학교에 무단 결석하는 아이, 학업을 게을리 하는 소년, 주인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점원이나 하인, 어떤 사업이나 직무 수행에 있어서 자기의 책임에 대하여 성실하지 못한 자, 이런 사람들은 그 잘못이 덮여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이 잘 하고 있다고 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수확은 품성이며, 이 품성이 현세와 내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Ed 108.2
수확은 뿌려진 씨를 거두는 것이다. 씨마다 “그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가진 품성의 특징도 이와 같다. 이기심, 자애심, 자부심, 그리고 방종은 번식한다. 이것들은 결국 불행과 파멸을 가져다 준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사랑과 동정과 친절은 축복이라는 열매를 맺고, 불멸의 수확을 가져 온다. Ed 109.1
수확할 때에, 씨앗은 여러 배가 된다. 한 알의 밀알은 여러 번 거듭 뿌려지는 중에 번식하여, 드디어 온 땅을 황금의 이삭으로 덮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지 한 사람의 일생, 또는 한 가지 행위의 영향력도 널리 퍼질 수 있다. Ed 109.2
그리스도께 붓기 위하여 깨뜨린 옥합에 대한 기억은 여러 세기의 긴 세월을 통하여 사랑의 행동을 얼마나 촉진시켰는가? 가난하고 이름없는 과부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막 12:42) 를 드림으로, 얼마나 많은 헌금이 구주의 사업을 위하여 드려졌는가? Ed 109.3